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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 동방의 비너스 - 합장노치보살(合掌露齒菩薩)

하록선장 | 08-28 06:21 | 조회수 : 2,024 | 추천 : 3

거란족을 단순히 고려와 전쟁을 치렀던 거친 북방유목민족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요왕조야말로 중국역사상 가장 불교미술이 융성했던 패권국가였기 때문이다.
여기 그 증거가 될만한 조각상을 하나 소개한다.

- 하록선장 -






안녕하세요 회원님들,
독일은 하루종일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다들 건강하게 행복한 주말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저는 그저 한중일 삼국의 사천왕상을 비교하는 글만 쓰려고 했는데요...
blog.naver.com/vishnublanc/...



그래서 우선은 한국 천은사와 조계사, 일본 도다이지의 사천왕상부터 검색을 하기 시작했었습니다.
구글의 연관검색 알고리즘을 따라 살펴본 다음 이미지들은 대만 중대선사(中台禪寺, 총타이찬쓰)의 거대한 사천왕상이었구요.
그 현란함에 잠시 감탄하다가, 다시 중국대륙으로 이동하니, 베이징시의 바로 옆에 대동(大同, 따통)이라는 유서깊은 도시가 있더라구요.



Canon EOS 5D | Aperture Priority | 12.00mm | ISO-100 | F9.0 | 1/50s | 0.00 EV | Multi-Segment | Auto WB | 2011-05-22 18:50:50


화엄사 전경



그곳에 바로 화엄사(華嚴寺, 华严寺, 화옌쓰), 거란족이 세운 요(遼, 辽)왕조의 사찰 겸 황궁이 있습니다.
처음엔 이곳 사천왕상이 생각보다 수려하길래 다른 불상들도 조금 검색해보니...
세상에, 제가 뭘 찾아낸거죠? 조각품 하나하나가 죄다 국보급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뭔가 격이 다른 보살입상이 하나 있습니다.




동방의 비너스



우리에겐 고려와의 전쟁으로 기억되는 거란.
이 거란이라는 북방의 유목민족이 이토록 섬세했던가요!
사실 요나라는 자신들이 한족에 동화되는 것을 무척 경계했다고 합니다.
거란족의 고유문자를 만들고 전통문화를 지키려고 애쓰던 영리한 정복왕조였던 셈이지요.
중국역사 속의 수많은 왕조들 사이에서도 21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건 다 그 때문인지도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송나라를 압박하던 요나라는 1038년에 이 황실사찰 화엄사를 창건했습니다.
이후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킨 금나라 역시 이곳을 그들의 황실사당으로 사용했구요.
그 후로도 화엄사는 계속된 전란 속에 여러차례 무너지고 다시 세워졌습니다.
엄혹했던 원제국과 명-청 시대에도 살아남은 유서깊은 사찰입니다.
현재는 중국의 국가문화유적지로 지정되어있다고 합니다.




이정도면 준(準)중원통일



이제 제 머리속에서 한중일의 사천왕상 비교라는 최초계획은 더이상 흥미거리가 아니었습니다.
화엄사 안의 독립건축물 하나하나마다 세밀하게 조성된 불상들이 빛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화엄사의 진짜 가치는 박가교장전(薄伽教藏殿, 티베트보살관)에 있습니다.
서른 점 이상의 본존불과 보살상, 사천왕상이 모셔진 곳입니다.





박가교장전(薄伽教藏殿)의 내부모습



그 중 가지런하고 하얀 이를 드러내고 허리를 가볍게 꺾은 채 두 손을 합장하여 서있는 조각상이 압권입니다.
바로 이것이 "합장노치보살(合掌露齒菩薩, 合掌露齿菩萨)", 높이 약 2미터의 채색소조입상입니다.
풋풋하고 사랑스러운 미소, 유려한 콘트라포스토 포즈, 율동적인 옷자락, 화려한 장식관.






합장노치보살의 부분도



조각상의 곳곳에서 5세기 북위시대 불상의 평면성이 희미하게 엿보입니다.
하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인도 비슈누상의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이겠지요.
아마도 힌두교의 치명적인 양식미는 중국과 실크로드의 긴 행로를 거치고도 탈색되지 않을만큼 짙었나봅니다.
신을 담은 조각품이 인간의 길을 따라 이동하며 그 모습을 조금씩 바꿔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화신(अवतार, 化身)의 역사" 그 자체 아니었을까요.




Chaturbhuj Temple,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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