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사진 찍는 취미에 푹 빠져서 살고 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커다란 검정색 카메라와 삼각대 같은 것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지가 무슨 프로작가야...?'
라며 혀를 찼건만, 지금 내 모습이 딱 그렇게 변해 있다.
세상은 별 수 없는 아이러니의 연속인 것.
내가 사진 찍는 취미에 빠지게 된 이유는 참 단순하다.
프로작가가 되려는 욕심도, 뭔가 위대한 작품을 하나 남기고 싶은 것도 아닌,
현.실.도.피.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빨간 꽃이 보이고, 파란 하늘이 보이고,
길가의 전봇대 하나, 다 쓰러져 가는 빈 집에도 색다른 느낌이 담겨진 듯 보인다.
그렇다고 내 사진이 다른 사람들 사진보다 멋지거나 예쁘지도 않고,
뭔가 의미심장한 의미를 담고 있지도 못하지만,
나의 삭막한 일상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들이 담기기에,
적어도 사진 찍는 동안 만큼은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비록 백일몽에서 아직 깨지 못한 몽상가일지라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이 영화에서의 '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명사적 의미의 '시'와는 전혀 다르다.
은유, 서정, 비유, 은율?
감독은 영화 제목을 굳이 '시' 로 지어 놓고 문학적 시의 요소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박또박 담담한 목소리로 우리들의 냉혹한 현실에 대해 지긋이 이야기한다.
'삶이 궁금한가? 차분하게 들어 보게. 삶이란 이런 것이지'
우리들은,
아니, 적어도 나는,
매순간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친다.
돈이 많았으면, 더 좋은 차를 탔으면, 더 큰 집에서 살았으면, 더 좋은 카메라와 렌즈가 있었으면,
......더 행복했으면,
좀 더,
조금만 더, 행복했으면.
하지만 일상은 늘 그렇듯, 녹록치 않다.
카메라를 둘러 메고 어딘가에서 좋은 경치와 예쁜 꽃을 찍다가 문득 울리는 휴대폰을 받으면
성난 목소리가 화들짝 나를 일상으로 돌려놓는다.
'정신차려. 넌 결코 벗어날 수 없어. 여긴 리얼월드야!'
이창동 감독은 전작에서도 늘 그랬듯, <시> 역시 철저하게 현실이란 범주 안에서의 판타지를 화두로 던진다.
그리고 결코 융화 할 수 없는 두 공간 사이의 무거운 괴리감을 탁월하게 담아낸다.
그런데 그 무거운 갑갑함이 익숙하다 못해 마치 내 것인 듯 오싹해지면,
영화는 작은 희망의 불빛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속삭이며 위로한다.
'힘 내, 아직 끝난 것은 아니야'
<밀양>처럼, <오아시스>처럼, 그리고 <박하사탕>처럼.
칸에서 상을 받았든, 세계의 저명한 영화인들이 '거장'으로 칭하든 말든,
전 정권에서 장관을 지내며 욕을 먹었든 말든,
나는 변함 없이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사랑한다.
러닝타임 내내 스크린을 보는 것 조차 무서울 만큼 무겁고 갑갑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 스탭의 이름 세 글자가 스크롤 될 때까지,
아니, 극장을 나서 집에 돌아와 이렇게 자판을 두드를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오랫 동안 변함 없이,
가슴이 터질 듯한 깊고 강한 울림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울림은 지치고 버거운 일상의 순간순간마다 나를 위로하기 때문이다.
'힘 내, 아직 끝난 것은 아니야. 아직'
모든 것은 다 현실 속에서 이뤄진다.
적어도 내가 이 매트릭스를 벗어날 빨간약을 찾아낼 때 까지는 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나는 변함 없이 꿈꿀 것이다.
더 행복한 내일을, 그리고 그 다음 날, 그 다음 날의 다음 날을.
이런 희망이란 몰핀 한 방이라도 없다면,
이런 소극적 타협안이라도 없다면,
정말 너무 삭막한 세상 아닌가.
한 동안, 아니 앞으로 계속,
오후의 일광이 따뜻하게 비치는 풍경을 보면 나는 <시>가 생각 나서,
가슴이 미어질 것이다.
영화 <시>는 문학적 시의 요소를 다 무시했다고 했지만,
실은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의 '시' 였다.
어느 날 곁으로 찾아왔다던 파블로 네루다의 시보다 조금 더 아름다운.
한국 근대 영화사의 '얼굴' 이셨던 윤정희 선생님과
스크린으로 '미자'의 인생을 보여주시고 또한 스크린 밖에서 나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주신 이창동 감독님과,
영화 <시>의 마지막 스크롤로 올라간 그 어느 스탭 한 사람에게까지,
뜨거운 진심이 담긴 박수를 보내드린다.
고마워요. 정말.
덕분에 오랫동안 위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마워요.
2010. 05. 13 개봉일에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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