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20년쯤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활을 시작할 때 쯤에,
저는 헤비메틀 음악에 심취하여 디줴이 박스가 있는 음악다방과 호프집을 전전하며
기라성 같은 록의 전설들을 찬양하고 숭배하며 청춘을 불사르고 있었지요.
그 때 제가 살던 곳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음악다방이 C.M.B란 곳이었는데,
씨는 커피,
에므는 뮤직...이거 왠지 손발이 조금 오그라들지요잉?
비는...알아서 상상하시길...^^
아무튼 중학생 때부터 위조신분증을 들고 다니며 문턱이 다 닳도록 일수를 찍어댔던 정성을 인정받아 아침시간 뒤제이로 당당하게 입성하게 되어 다운타운가의 락문화에 일조(?)를 하게 됩니다. (사실 제 후배 디제이들이 지역라디오방송 디제이와 피디로 진출할 정도로 그 씨엠비의 영향력은 막강했었습니다.)
그 씨엠비가...1층은 음악다방, 2,3층은 극장이었는데,
지금처럼 멀티개봉관이 없던 시절의 극장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넓었거든요.
200평이 넘는 직사각형에 기둥 하나 없는 공간, 당시 시가로 억대를 바른 트윈 진공관램프.
그 시스템으로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나 베토벤 9번 합창교항곡 들어보면 정말 그... 음악으로 느낄 수 있는 최고 절정의 느낌을 찌릿찌릿...^^
거참, 왜 옛날 청춘 영화보면 그렇잖아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은 생머리 소녀.
어느 순간 앞에 나타나서 생글생글 웃어주는 그런 소녀.
(그 소녀가 임예진씨였는데 요즘 이미지는 좀...ㅎㅎ)
음악다방에 새로 알바 서빙이 왔는데, 딱 그런 소녀더라구요.
그리고 웃으면 너무나 깊게 파여 버리는 보조개....
늘 생글거리며 다방식구들에게 ‘옵빠’를 외치던 그 아이 덕분에 분위기가 너무 좋았고
흑심을 품는 늑대 녀석들도 늘어갔습니다. 당근 저도 마찬가지로...^^
그런데 저에게 딱 기회가 오더군요.
여자 디제이 누나가 한 분 계셨는데,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어서 그 자리를 대체할 사람이 필요하게 된 것이지요.
굳이 밖에서 사람 찾지 말고 목소리 예쁘고 상냥한 그 아이를 시켜보자고 메인 디제이 형님을 졸랐더니 한 달 정도 제 타임에 잘 가르쳐보라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
앰프 켜기, 믹서기 버튼 조절하기, 턴테이블과 카드리지 조작법, 디스크 찾는 법, 디스크 닦는 법, 마이크에 입 대는 위치, 톤 조절하는 방법...
한 달 동안 제 견습이 된 그 아이는 온갖 정성 다해서 가르쳐준 사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얼마 후 음악다방 씨엠비의 최고 인기 디제이가 됩니다.
사실, 온갖 추파가 많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아이는 요지부동 하지 않고 저를 사부로 잘만 따랐기에 다방식구들 모두 우리 둘이 커플이 되는 걸로 알고 있었지요..
저도 물론 그랬구요.
뭐, 지금처럼 금새 우리 사귀는거다 아니다 하며 쇼부 보던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봄에 시작된 그 아이와의 인연이 계절이 지나고 지나 딱 지금 시즌이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과 Wham의 ‘Last Christmas'가 시간마다 나와 줘야 하는 시즌.
첫 눈이 내리면 고백할까나. 아니면 어찌할까나.
참 순진도 했던 어린 저는 하늘에서 첫 눈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첫 눈 대신 다른 누군가 우리 다방을 찾아오게 되더군요.
저녁시간 그 아이 타임이 끝나고 제가 마지막 타임 방송을 위해 커다란 디제이 박스에 블라인드를 내리고 제 시그널 음악이었던 마스카니의 카바렐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을 돌리기 시작했을 때, 아주 건장하고 훤칠한 군복 아저씨 한 분이 다방문을 열고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들어옵니다...
뭐, 거참, 그 때 그 시절 이야기는 다 그래요.
더벅머리 여고생이 교회에서 알게된 옵빠를 짝사랑했는데,
그 옵빠가 군대를 가버렸고 (그 때는 36개월 군대였답니다. 지금과는 좀 많이 달랐지요)
그 사이에 더벅머리 여자애는 다 커버렸고, 옵빠는 지극정성으로 편지를 하던 그 아이에게 감동하여 마지막 휴가 때 그 아이가 유명한(?) 디제이가 되어있다는 다방문을 열게 되었다...
뭐, 그런,
아주 손발이 오그라드는 유치뽕작인 거지요...
아무튼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제가 1시간 30분 방송을 대충대충 마치고
나와서 그 커플과 합석을 했는데,
그 얼굴 길죽한, 작대기 네 개 달고나온 군인 아저씨가 커다란 가방에서 꺼내든 것이 바로
펜탁스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진 카메라였습니다.
그 카메라로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거절하던 저와 그 아이를 디제이 박스에 앉혀놓고 셔터를 누르던 그 군인 아저씨.
‘사부님 덕분에 디제이 되었으니 기념을 남겨야지요’
하고 했던지 말던지...손발 오그라드는..ㅡㅡ;;
아무튼 나중에 받아든 그 흑백사진이 어찌그리도 마음 찡하던지요.
어색한 표정의 청년 ‘나’와 내 맘을 꽤 오래 아프게했던 보조개 예쁜 ‘그 아이’ 뒤로 벽면 전체를 가득 메운 LP 디스크들...장비들...
아웃포커싱이 아주 멋들어지게 된,
색감 깊은 흑백사진 한 장이,
아쉽게도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제 곁의 K-x군 이마에 선명하게 새겨진 PENTAX 로고는 소중한 기억 하나를 담고 있어요.
옷,
잡담이 꽤 긴 글이 되어버렸네요.
여기까지 읽어주신 당신은 진정한 멋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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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09-08-11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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