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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x-100] 된장남녀 놀이

lorien | 03-31 21:02 | 조회수 : 914




중증의, 아니 불치의 카페인 중독자인 내게
일본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동네마다 숨어 있는 작은 오리지널 커피샵들이었다.

체인점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생두를 배전하고 블렌딩하여
커피를 끓여내는 가게들.

그 중 하나로 요코하마에 無 라는 가게가 있다.

그야말로 아무 사전정보 없이 지나가다 이름이 마음에 들고, 숯불로 배전한다는 게 마음에 들어
가파른 나무 계단을 학학대며 올라가 들어간 이 가게,
알고 보니 관광 가이드에 실릴 만큼 꽤 유명한 곳이었다.

같이 간 제자들은 나처럼 카페인 중독 말기가 아니니 그냥 시큰둥해 했지만,
나는 그 조금은 고풍스럽고, 일본답지 않게 어찌 보면 무뚝뚝하기까지 한
초로의 바리스터가 커피를 끓여 내던 그 가게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요코하마에 갔던 날은 전 일정 중에서 가장 눈부시게 맑고 아름다운 날이었다.
전날 내린 눈으로 대기의 묵은 때가 깨끗이 씻겨 내리고
반짝이는 햇살, 믿기지 않을 만큼 차갑고 새파란 겨울 하늘,
그리고 새파란 바다 위로 부서져내리는 햇살의 조각들.

나지막한 건물들이 쭉 이어져 있는 모토마치 상점가,
2층 창문으로도 햇살은 넘치게 쏟아져 들어왔다.

제자녀석 하나는 피곤했는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나와 다른 제자 하나는 카메라를 꺼내 열심히 된장남녀 놀이를 시작했다.

지금도 그 날, 햇살이 벽에 그려내던 빛의 궤적이 떠오른다.
점점 희미해질 그 날 그 빛의 기억은
다행히도 사진 속에 남아 앞으로도 오래 오래 내 기억의 마모를 위로해 주겠지.

아마도 그래서 나는 사진이 좋은가보다.
쇠락하고 마모되어 가는 불완전한 기억의 틈을 메꿔주고,
내가 바라보고 싶었던 그 프레임 안으로 미화된 시간을 가두어 주니까.

그 역할만 해 준다면
명암부 계조니 색 재현력이니 선예도니 노이즈니
신경 쓸 일 무어랴...




 



★ lorien님의 팝코 앨범 ★
https://photo.popco.net/17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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