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퍼 2017-06-08 10:38 잡설을 조금만 더 늘어놓겠습니다.
세르피코님이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시는 것 같아서
저가 선택한 타협점에 대해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저의 문제는 조금 원초적인 부분으로..
사진의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는게 싫었습니다"
→
대형 인화를 추구할 때 제가 품었던 고민과 동일합니다.
필름의 물리적인 크기에서 기인하는
출력 이미지 크기의 한계성에 실망을 했었습니다.
회화나 동양화를 감상하면서 화가는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캔버스의 크기에는 한계가 없으니
작가의 생각을 물리적 크기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죠.
반면에 사진은 조금 다릅니다.
사진 작품의 크기는 필름이라는 물리적인 크기에 종속되어야 하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그 물리적 종속성에서 벗어나고자
더 큰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사진을 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귀착점일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종속의 주체가 필름에서 CCD라는 것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지를 저장하는 물리적인 매질이
전자적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이 외에
이미지를 순간적으로 저장하고 출력하는
절차적인 변화에는 별다른 차이는 없어 보입니다.
이 물리적 매질이 변했다고 하더라도
사진이라는 개념이 원천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사진을 하는 사람들이 더 크고 더 선명한 이미지를 출력할 수 있는
대형 CCD를 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필름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듯이 CCD의 크기도 일정 크기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현실을 감안할 때,
사진이라는 출력물이 무한 캔버스에 작가의 철학을 그려내는
회화의 크기를 흉내 내는 일은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CCD의 크기에 종속적인 사진 예술의 한계를
작가가 극복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귀결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형으로 출력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CCD의 화소가 보일지라도 무한 크기의 출력물에
도전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전자의 경우를 선택했고,
"포기"라는 단어 대신에 "타협"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포기라는 단어는 왠지 패배의 의미가 있어서
왠지 제가 진 느낌이라서 단어를 바꾸었습니다.
저의 지인 중에 서양화가가 계십니다.
그 분의 푸념은 우리와는 사뭇 다릅니다.
필름의 크기에 의해 이미지의 크기가 결정되는 사진 예술이
그 서영화가는 부럽다는 것이죠.
화폭의 크기가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작게도 느껴지고
어떨때는 너무 크게도 느껴진다는 것이죠.
이럴 경우 카메라의 정해진 규격(필름의 규격과
필름의 크기에 따른 최대 출력물의 범위)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만들 것 같다고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화가분의 말씀을 듣고
필름 크기에 종속된 사진의 한계가 다른 시각에서는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타협했습니다.
적당한 크기로 사진을 출력하자.
이제는 고민의 대상이
사진의 적당한 크기가 어떤 크기인가로 변해있었습니다.
적당한 크기를 고민하다보니
사진에서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의미가 잘 표현되는 크기가
어떤 크기인지를 더 찾게 되었습니다.
이제 대형 출력물이 주는 호방한 느낌은
저를 더 이상 유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20R을 넘기는 사진을 출력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진의 크기에 대해서 저와 타협을 한 것입니다.
아마도 타협의 이면에는
제 사진의 품질이 좋지 못한 것이 한 몫을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작은 사진일 때 보이지 않던 잡스런 것들이
대형 사진으로 출력해 놓으면 지저분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얼굴의 결점을 감추기 위해서 어두운 조명아래에서
맞선을 주선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제 사진의 결점을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작게 출력하고 있다는 것이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적당히 타협하고 살고 있습니다.
타협이 많아질수록 맘은 편해지지만 잃는 것도 많아집니다.
작가에게 있어서 타협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작가에게 있어 최대의 적은 타협입니다.
타협이 끼어드는 순간 작가의 도전정신이 희석되기 때문이죠.
도전정신이 묽어지는 순간 좋은 작품,
신선한 작품은 기대하기 어려워지는 것이죠.
그러나
뱁새가 황새(전문 사진작가님들)를 쫒아가다 보니
가랑이가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기 어려워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이 이상한 곳으로 흐르는 것 같아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세르피코님의 현재 고민의 결과가 어떻게 해결될 지 궁급합니다.
혹시 해결의 기미가 보인다거나 해결이 되어가는 중이라면,
삼톡의 동인들과 결과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댓글을 쓰다 보니 별 내용도 없는데 길어졌습니다.
아마도
저와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의 물리적인 한계에 대해서
저가 나름대로 고민했던 경험을 말씀드리고자 한 것으로
이 댓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조언을 한다거나
제 생각을 강요하고자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세르피코님이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시는 것 같아서
저가 선택한 타협점에 대해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저의 문제는 조금 원초적인 부분으로..
사진의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는게 싫었습니다"
→
대형 인화를 추구할 때 제가 품었던 고민과 동일합니다.
필름의 물리적인 크기에서 기인하는
출력 이미지 크기의 한계성에 실망을 했었습니다.
회화나 동양화를 감상하면서 화가는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캔버스의 크기에는 한계가 없으니
작가의 생각을 물리적 크기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죠.
반면에 사진은 조금 다릅니다.
사진 작품의 크기는 필름이라는 물리적인 크기에 종속되어야 하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그 물리적 종속성에서 벗어나고자
더 큰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사진을 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귀착점일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종속의 주체가 필름에서 CCD라는 것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지를 저장하는 물리적인 매질이
전자적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이 외에
이미지를 순간적으로 저장하고 출력하는
절차적인 변화에는 별다른 차이는 없어 보입니다.
이 물리적 매질이 변했다고 하더라도
사진이라는 개념이 원천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사진을 하는 사람들이 더 크고 더 선명한 이미지를 출력할 수 있는
대형 CCD를 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필름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듯이 CCD의 크기도 일정 크기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현실을 감안할 때,
사진이라는 출력물이 무한 캔버스에 작가의 철학을 그려내는
회화의 크기를 흉내 내는 일은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CCD의 크기에 종속적인 사진 예술의 한계를
작가가 극복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귀결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형으로 출력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CCD의 화소가 보일지라도 무한 크기의 출력물에
도전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전자의 경우를 선택했고,
"포기"라는 단어 대신에 "타협"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포기라는 단어는 왠지 패배의 의미가 있어서
왠지 제가 진 느낌이라서 단어를 바꾸었습니다.
저의 지인 중에 서양화가가 계십니다.
그 분의 푸념은 우리와는 사뭇 다릅니다.
필름의 크기에 의해 이미지의 크기가 결정되는 사진 예술이
그 서영화가는 부럽다는 것이죠.
화폭의 크기가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작게도 느껴지고
어떨때는 너무 크게도 느껴진다는 것이죠.
이럴 경우 카메라의 정해진 규격(필름의 규격과
필름의 크기에 따른 최대 출력물의 범위)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만들 것 같다고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화가분의 말씀을 듣고
필름 크기에 종속된 사진의 한계가 다른 시각에서는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타협했습니다.
적당한 크기로 사진을 출력하자.
이제는 고민의 대상이
사진의 적당한 크기가 어떤 크기인가로 변해있었습니다.
적당한 크기를 고민하다보니
사진에서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의미가 잘 표현되는 크기가
어떤 크기인지를 더 찾게 되었습니다.
이제 대형 출력물이 주는 호방한 느낌은
저를 더 이상 유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20R을 넘기는 사진을 출력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진의 크기에 대해서 저와 타협을 한 것입니다.
아마도 타협의 이면에는
제 사진의 품질이 좋지 못한 것이 한 몫을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작은 사진일 때 보이지 않던 잡스런 것들이
대형 사진으로 출력해 놓으면 지저분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얼굴의 결점을 감추기 위해서 어두운 조명아래에서
맞선을 주선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제 사진의 결점을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작게 출력하고 있다는 것이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적당히 타협하고 살고 있습니다.
타협이 많아질수록 맘은 편해지지만 잃는 것도 많아집니다.
작가에게 있어서 타협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작가에게 있어 최대의 적은 타협입니다.
타협이 끼어드는 순간 작가의 도전정신이 희석되기 때문이죠.
도전정신이 묽어지는 순간 좋은 작품,
신선한 작품은 기대하기 어려워지는 것이죠.
그러나
뱁새가 황새(전문 사진작가님들)를 쫒아가다 보니
가랑이가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기 어려워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이 이상한 곳으로 흐르는 것 같아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세르피코님의 현재 고민의 결과가 어떻게 해결될 지 궁급합니다.
혹시 해결의 기미가 보인다거나 해결이 되어가는 중이라면,
삼톡의 동인들과 결과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댓글을 쓰다 보니 별 내용도 없는데 길어졌습니다.
아마도
저와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의 물리적인 한계에 대해서
저가 나름대로 고민했던 경험을 말씀드리고자 한 것으로
이 댓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조언을 한다거나
제 생각을 강요하고자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기분이 언짢으셨다면 다시 한 번 더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