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화 주 2017-10-30 19:58 사적 제31호. 〈삼국유사〉에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해 682년(신문왕 2) 완성했으며,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로 고쳐 불렀다.
1960년과 1979~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이탑식가람배치로 남북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며, 양 탑의 중앙부 뒷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금당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금당의 바닥구조가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위에 직사각형의 석재유구를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모양으로 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롭다.
원래 앞면 8칸, 옆면 4칸이었던 북쪽 강당은 후대에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고쳐 지은 것도 밝혀졌다.
위는 네이버양이 알려주는 감은사지의 설명입니다.
위 설명처럼 과연 저 탑 밑에는 동해를 바라볼수있는
지하공간이 있어서 용이 거주 하고 있을까요?
감은사지는 동해바다에서 아주 가까워서
감은사지에 서면 동해바다가 얼핏보입니다.
그 바다에 문무대왕릉이 있고요.
(맨아래사진 저멀리에 녹색 안내판과 전봇대가
보이는데 전봇대 넘어가 동해바다입니다.)
지하에 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은사지에 서면 현재 용이 있든 없든
과거에 용이 꿈틀거리던
기운을 느끼실수가 있을겁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로 고쳐 불렀다.
1960년과 1979~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이탑식가람배치로 남북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며, 양 탑의 중앙부 뒷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금당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금당의 바닥구조가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위에 직사각형의 석재유구를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모양으로 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롭다.
원래 앞면 8칸, 옆면 4칸이었던 북쪽 강당은 후대에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고쳐 지은 것도 밝혀졌다.
위는 네이버양이 알려주는 감은사지의 설명입니다.
위 설명처럼 과연 저 탑 밑에는 동해를 바라볼수있는
지하공간이 있어서 용이 거주 하고 있을까요?
감은사지는 동해바다에서 아주 가까워서
감은사지에 서면 동해바다가 얼핏보입니다.
그 바다에 문무대왕릉이 있고요.
(맨아래사진 저멀리에 녹색 안내판과 전봇대가
보이는데 전봇대 넘어가 동해바다입니다.)
지하에 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은사지에 서면 현재 용이 있든 없든
과거에 용이 꿈틀거리던
기운을 느끼실수가 있을겁니다.
한번 가셔서 느껴보시길.......